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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2018. 1. 31. 14:23

아픔이 길이 되려면


/ 미세먼지가 천식을 유발하고 석면이 폐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우리가 관계 속에서 겪는 차별과 같은 사회적 폭력 역시 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 사회적 폭력에 노출된 약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가지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차별을 경험해도, 과연 자신의 경험이 차별이었는지 판단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특히 차별 대우에 만성적으로 익숙해진 사람일수록 그런 판단을 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 낙태

/ 1963년부터 시행된 산아제한정책에서 낙태는 음성적으로 활용된 효율적인 수단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 낙태는 매년 30만 건 가까이 행해졌고, 그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나 1980년대에는 매년 약 100만 건의 낙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태아가 낙태의 고려대상이 된 것은 아닙니다. 통계청 '인구동향조사'에 따르면, 자료가 수집된 1970년 이후로 여자 출생아 100명당 남자 출생아 숫자를 지칭하는 출생성비는 항상 100명이 넘었고, 1990년대에는 116명까지 치솟았습니다. 뿌리깊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성별이 여성인 태아가 먼저 낙태의 고려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실질적인 낙태 규제를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가 본격화된 2003년 이후였습니다. 1996년까지 인구감소를 위해 음성적으로 낙태를 허가했던 한국 정부는 2003년부터 출산장려정책으로 입장을 바꾼 뒤, 낙태를 저출산의 주범으로 지목했습니다.

/ 한국 정부는 낙태를 음성적으로 권장하던 시기에도, 낙태금지를 실질적으로 고려하는 시기에도 계속해서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결정 과정에서 당사자인 여성은 항상 배제되었습니다. 이 예민하고도 복잡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여성이 왜 낙태를 선택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 고통스러운 당사자의 목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시작일 것입니다.


■ 태아기

/ 태아기의 영양 결핍이 성인 만성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절약형질 가설(Thrifty Phenotpe Hypothesis)이라고 부릅니다. 혹은 이 분야에 학문적으로 큰 기여를 한 데이비드 바커 박사의 이름을 따 '바커 가설'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태아기의 영양 결핍이 성인기 당뇨병 발생의 원인이 되는 것은 태아 입장에서도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 영양분이 부족할 때 태아는 생명체로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한정된 영양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살아남는 데 가장 효과적인지에 대해 답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태아는 뇌와 같이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기관에 먼저 영양분을 사용하고, 당장 내 생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췌장과 같은 기관을 발달시키는 데에는 영양분을 적게 사용합니다. 설사 그 선택이 먼 훗날 당뇨병을 유발해 수명을 단축시킨다 할지라도, 지금의 생존을 위해 먼 훗날 발생할 수 있는 성인병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 가난과 해부학

/ 인류 역사에서 오랜 시간 사회적 금기였던 인체해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몸을 발판으로 한 걸음씩 전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해부학적 지식 뒤에는 가난으로 인해 물건을 훔치다가 사형을 당한, 가난으로 인해 구빈원에서 죽어갔던 이들의 몸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 인류 역사에서 오랜 시간 사회적 금기였던 인체해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몸을 발판으로 한 걸음씩 전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해부학적 지식 뒤에는 가난으로 인해 물건을 훔치다가 사형을 당한, 가난으로 인해 구빈원에서 죽어갔던 이들의 몸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건강은 공동체의 책임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병리적인 변화는 항상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나타나고 진행됩니다.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에,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노이라트의 배와 우리의 선택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 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 쌍용자동차

/쌍용차 문제는 재난의 문제다. 인간이 만든 해고가 인간의 삶을 부수는 극단의 형태로 드러난 정치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이 6년 동안 지속되는 와중에 국가는 해고자와 가족이 다시 설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해주지 못했고 쌍용자동차 관련 노동자와 가족 28명은 죽음으로 이 재난의 사회적 의미를 알려주었다. 급격한 사회 경제적 지위의 하락과 사회적 지지의 단절 속에서 해고자는 6년간의 모든 부담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감당해야 했고 본 연구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정리해고가 그들의 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노동자들이 해고로 인한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또록 돕는 것이 국가와 정책입안자의 책무이자 역할이다. 본 연구는 정리해고가 노동자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 시급하다는 점을 보여준다.